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차시 1세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 1476년 초, 에스테르곰 대주교 베켄슬로르 야노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빈으로 도망쳤다. 그는 에스테르곰 교구의 금고를 가지고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제공했다. 이에 마차시는 황제가 대주교를 선동해 이런 비열한 짓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1477년 3월 [[튜튼 기사단]], 바르미아 대주교단과 동맹을 맺은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헝가리군이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하여 빈을 봉쇄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에게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교황]] [[식스토 4세]],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중재로, 마차시는 12월 1일 프리드리히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황제는 마차시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100,000 플로린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배상금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를 내지 않으려들자, 마차시는 1479년 3월 26일 스위스 연방과 일련의 협약을 체결해 신성 로마 황제의 [[스위스 용병]] 모집을 방해했다. 여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베른하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카르니올라 공국|크라인 공국]]에 있는 대주교령의 요새를 소유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1482년 1월, 검은 군대가 하인부르크 안 데어 도나우를 포위 공격했다. 그해 4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선전포고한 마차시는 6월 말부터 하인부르크 공방전을 지휘해 10월에 함락시켰다. 그 후 그가 통솔하는 검은 군대는 3개월 동안 장크트 바이트 안 데어 글란(Sankt Veit an der Glan), 엔체르스도르프 데어 피샤(Enzersdorf an der Fischa), [[쾨세그]]를 공략했다. 교황 특시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는 마차시와 프리드리히 3세간의 평화 협약을 중재하려 했지만, 마차시는 이를 거부했다. 1485년 1월, 검은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빈을 포위했다. 5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6월 1일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빈이 넘어갔다. 마차시는 빈에 입성한 뒤 왕실을 이곳으로 옮기고,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귀족들을 빈으로 불러들인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1486년 2월 16일, 헝가리를 피해 빈에서 탈출하여 [[린츠]]로 피신했던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7명 중 6명을 설득해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을 [[독일왕]]으로 선포하게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으로서 선거 권한이 있던 블라디슬라프나 마차시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차시는 블라디슬라프를 초대해 그해 9월 이흘라바에서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블라디슬라프는 곧 마음을 바꿔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을 인정했다.[* 어차피 황제(독일왕) 선거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과반수였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가 승인하건 말건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은 인정되었다.] 마차시는 이후에도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공세를 이어갔다. 검은 군대는 라안데어타야와 슈타인을 포함한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마차시는 니더외스터라이히를 다스리기 위한 재판소를 세웠다. 1487년 에벤푸르트(Ebenfurth)에서 열린 니더외스터라이히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빈 대교구의 관리자인 서포여이 이슈트반을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점령한 도시와 요새의 수비를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그 외의 행정은 프리드리히 3세 밑에서 일하다가 자신에게 복종한 오스트리아 관리들에게 맡겼다. 비너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는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도시들 중 유일하게 마차시에게 끝까지 항전했으나, 1487년 8월 17일에 끝내 함락되었다.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3세[* [[에른스트(작센)|에른스트]]의 동생으로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계의 시조.]가 헝가리군을 격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이르자, 마차시는 그와 협상을 벌인 끝에 1487년 12월 16일 [[쾰른]]에서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마차시는 뒤이어 프리드리히 3세와 아들 막시밀리안에게 헝가리 왕을 자처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답변을 수 년간 미루었고, 마차시는 이들을 압박하고자 린츠로의 공세를 준비했으나 도중에 통풍에 걸려 쓰러지자 계획을 취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